부마태라 불렸던 마르다 스콧 브루언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화이트 헤이븐에서 태어났고 1895년 토론토 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녀는 선교사 후보생인 젊은 목사 브루언과 약혼을 하면서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혼 후에 1902년 5월 12일 남편이 사역하는 대구에 부임하였다.
그녀는 27세의 젊은 신부의 몸으로 부임하여 28년간 줄곧 대구·경북에서 사역하였다. 교육학을 전공한 그녀는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교육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여자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보았고 존슨 부인과 함께 바느질 교실 운영을 통해 체계적인 교육을 위한 여자소학교가 필요하다 생각하게 되어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신명여자소학교였다. 이후에 선교지부 안에 5칸짜리 일자형 한옥인 부인용 사랑채를 교사로 하여 신명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고 현재는 신명여자고등학교로 발전 지속하고 있다.
1931년까지 118명의 학생들이 이 학교를 졸업하여 대구·경북지역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고, 지방 여성 교육의 창시자로 불리었다.
마르다 브루언의 전도 열매인 신명여자소학교, 1902
마르다는 1916년 남산교회 부인 주일학교와 농촌교회 여전도회를 조직하며 부인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남편 브루언 선교사와 함께 칠곡, 선산, 성주, 김천 등 경북 서부지역을 수시로 순회하며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9월 유방암이 발견되어 동산기독병원에서 혹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악성이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녀는 두 딸과 남편을 두고 먼저 별세하였다.
그녀는 대구 선교지부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 선교사로부터 매우 탁월한 여성이었으며 브루언 부부는 가정에서는 우애가 있고 선교지부에서는 영향력 있는 멋진 부부였다고 평가하였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있는 마르다 묘비
노세영이라 불렸던 시릴 로스는 1867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고 1897년 의사인 아내 수잔 섕크 로스와 함께 내한하여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899년 경남 함안군의 이영리교회를 설립하고 1901년에는 부산의 영주동교회를 설립했다. 1902년 선천으로 이주하여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남자성경학교장을 역임했다.
만주 지방을 여행하여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만주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 이후 북쪽지방까지의 전도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캐나다의 ‘토론토부인회’의 자금지원으로 강계 지역 선교기지를 세웠고 1912년 장로교총회가 조직되면서 일곱 노회 중 초기 평북 노회장에 역임했다.
1912년 만주 선교를 통해 부인성경반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였다. 성서개역위원으로 1937년 완성된 한국성서 개역 작업에 참여하여 한국 성서사업에도 큰 공을 남겼다. 1937년 4월 아내 수잔 섕크 로스와 함께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1963년 2월 5일 9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탄절 카드에 실린 로스 부부, 1937년
시릴 로스의 죽음에 대한 신문 기사
차미수라고 불렸던 올리버 본 챔니스는 1925년 대구선교지부에 부임하여 대구를 비롯해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 동부지방 교회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챔니스는 동산기독병원 2대 플레처 원장과 함께 애락원에서 부원장직은 맡아 한센병 환자들의 자활 사업으로 농지조성과 목축업 등을 지도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를 통해 한센병 환자들의 자활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다가 1948년 해방 후 재 내한하여 대구에서 사역을 감당했고 1949년 선교사를 사임하고 귀국하여 1987년 1월 1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동산기독병원 전도회 회원들과 올리버 챔니스(3열 오른쪽 2번째)
부례문이라 불렸던 레이먼드 프로보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군인으로 일본인을 축출하고 한국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은 하지(Hodge) 장군을 따라서 한국에 왔다. 1년간 통신부서에서 근무하였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졸업도 하지 않은채 1948년 미북장로교 선교본부의 파송을 받아 잠시 내한하여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52년 미국에서 마리엘라 탈메이지와 결혼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다시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프로보스트는 아내 마리엘라와 함께 동산기독병원 고아원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리고 1960년에 경동노회에서 프로보스트를 경주에 있는 문화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도움으로 경주문화학교는 현재 문화중·고등학교로 기독교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7대 병원장인 마펫 선교사는 경주에 자주 봉사활동을 가면서 경주에 병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마침 미국을 방문할 때 프로보스트의 소개로 컴버랜드 제일장로교의 로버트슨 담임목사를 소개 받아 경주에 병원설립의 필요성을 교회에 설명했다.
프로보스트의 도움으로 총 네 차례의 걸쳐 3만 1,470달러를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1962년 10월 10일 지하 1층, 지상 2층의 경주기독병원을 건축하였다. 1975년 교회의 후원으로 3층을 증축하여 병원의 이름도 “Cumberland Presbyterian Hospital in Kyungju, Korea”라고 불렀다.
1963년 휴가차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1965년 매키노시 스트레이츠 교회 목사로 시무하게 되고 1973년 “한국장학재단”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여 한국에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97년 2월 그는 암 진단을 받은 지 6개월 만에 78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노년의 프로보스트 부부
계명대학교 경주동산병원, 2022년
도날드 클리펜슈타인은 1025년 1월 10일 네브래스카주 핸더슨에서 태어났다. 1954년 12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였다. 이 둘 부부는 메노나이트 교회 신자였다.
1955년 메노나이트 선교회의 파송 선교사로 한국지부의 책임자로 오게 되어 부부가 함께 내한했다. 당시 6·25전쟁 이후 황폐해진 한국 땅에서의 물자 원조, 교육, 사회 복지 등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 봉사의 정신으로 한국 선교에 헌신하였다. 대구, 경산,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제와 교육, 지역개발 사업들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경산 지역에 메노나이트 직업 중·고등학교를 세워 1971년까지 20년간 운영하였고 청소년들에게 신앙교육과 배움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 봉사 정신을 주므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메노나이트 선교회는 2001년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로 정식 발족되어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클리펜슈타인은 2015년 2월 18일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도날드 클리펜슈타인이 한국 CTS방송국으로부터 받은 감사장, 2012. 5. 24
구의령 목사 또는 구의령 선교사라 불렸던 윌리엄 알버트 그럽은 1924년 미국 오하이오주 맨스필드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터민스터 장로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1954년 2월 미연합장로교회의 파송 한국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루이스 그럽과 결혼 한 후에 슬하에 아들 셋을 낳아 길렀는데, 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회고하기를 자녀를 한국에서 낳고 길렀던 것을 매우 만족해하며 잘한 일로 여겼다.
그럽은 내한 이후 41년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선교동역자로서 대구를 중심으로 농촌지도자 양성 및 학생 지도를 했고 계명대학교 강사와 영남신학교 교수 및 협동 교장을 역임했다.
1955년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하여 은퇴 선교사 마을 웨스트민스터 가든에서 생활했고 201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복을 입은 윌리엄과 루이스 그럽, 노년의 부부, 교실에서 윌리엄 그럽
오천혜라 불렸던 조지 클라트슨 월스는 1923년 3월 23일 중국 선교사인 조지 클라크슨 월스 목사와 엠마 월스의 구남매 중 일곱째로 중국에서 태어났다. 월스는 1949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아내 루이스 맥스웰 템플을 처음 만나 1949년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1954년 교육선교사로 내한했다.
월스는 계성학교 영어 교사로 역임했고 계명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수로 섬기면서 사범대학을 교육대학으로 승격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를 통해 콩나물 교실을 보면서 가족 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가족계획사업을 벌였다.
하워드 마펫 원장의 보고서에는 따르면 월스는 1957~1958년도에 동산기독병원 이사를 역임하였다.
한국 사단법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1998년 가족계획 사업을 처음으로 벌인 월스의 한국 이름을 따서 ‘오천혜 상’을 제정했고 현재까지도 3년마다 시상을 하고 있다.
1975년 5월 10일 월스는 미국 인구협회 한국 대표의 임기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해서 지역사회를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여생을 보냈다.
월스는 1996년 6월 8일 7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레베카 밴 클리브는 윌리엄 밴 클리브의 아내이다.
그녀는 동산기독병원에서 간호사로 사역하며, 시간제로 간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대구 중국인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엘리자베스 메리 루엔스트로스는 1910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해럴드 윌리엄 루엔스트로스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병으로 죽었다.
남편이 미국에서 은퇴한 이후 선교사로 함께 내한했다. 남편 해럴드 루엔스트로스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동산기독병원에서 금융설계사로 일하였으며,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도와 선교활동을 했다.
그녀는 2009년 5월 16일 스파턴버그에서 9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김경미라고 불렸던 캐롤 컬스팅은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산부인과와 소아과, 공중보건과에서 모자보건 간호사로 봉사 활동을 했다. 또한 동산기독병원 부속간호전문학교에서 보건간호학을 강의하였다.
애칭이 말리인 메리 램프 스터트밴트는 1927년 2월 12일 선교사인 부친 램프와 모친 룻 하이든 램프 사이에서 한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메리는 이북의 선천에서 13살까지 살다가 일본정부가 선교사를 추방함으로 부모님과 함께 1940년 11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메리는 게일스버그에 살면서 낙스 대학에서 공부했고 영문학을 전공하며 부전공으로 지리를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세인트 루이스로 이사하여 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언니의 소개로 의과대학생인 하우드 스터트밴트를 만나 나중에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이 은퇴한 뒤에 함께 한국과 중국, 멕시코 등지를 다니면서 선교 사역에 동참했다. 1980년 동산병원에 와서 메리는 간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메리는 다섯 자녀들을 통해 13명의 손주와 8명의 증손주를 보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2016년 1월 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