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해밀턴 도슨은 1926년 6월 6일 미국 아이오와주 폴크 카운티 디모인에서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 존 해밀턴 도슨과 어머니 폴린 도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도슨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인류 봉사를 위하여”라는 학교 교훈에 감명을 받아 가슴 깊이 새겼으며 그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나중에 의료 선교사로 헌신케 되는 아주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1944년 3월 브라운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중퇴하고 다시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50년 4월 2일 평소 알고 지내던 메리 앤 한센과 결혼했다. 1951년 6월 11일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료했고, 시카고 성 누가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밟았다.
도슨은 1951년부터 52년까지 미국 해병대 1여단 군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프레지던셜 유니트 사이테이션’ 훈장도 받았다. 한국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가 목격한 한국인들의 고통과 박탈감은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의료 선교에 대한 사명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 마음으로 생각하길 “후일 나는 한국인을 돕기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1953년 미국 해병대를 전역한 후 시카고 힌즈 퇴역 군인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일을 했고 이때 동산기독병원의 원장인 하워드 마펫 선교사를 만났다. 1963년 6월 머서 아일랜드 언약교회로부터 의료 선교사로 임명받았고 1963년 10월 10일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내한했다.
도슨은 대구에 도착한 지 이틀 후에 첫 번째 수술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하루에 적게는 한 건, 많게는 네 건의 수술을 한 날도 있었다. 이철 외과 과장을 대신하여 동산기독병원 외과 과장 자리에 의료 선교사로 섬겼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3년간 2,500건 이상의 수술을 주도하거나 감독했다. 이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술 집도 횟수이다. 이러한 그의 헌신을 통해 수많은 대구·경북의 환자들이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애락원의 한센병 환자들 중 눈썹이 빠진 환자는 머리카락 부분을 이식하는 수술을 자주 했고 속눈썹이 없는 경우 속눈썹 근육을 턱을 움직이는 근육에 연결하는 수술을 하므로 눈을 감고 입은 열기 때문에 좀 이상하게 보이지만, 시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도슨은 1966년 고압산소 치료기를 제작하여 1968년 한 해 동안 40여 명의 연탄중독 환자를 치료하는데 성공하였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존 도슨
도슨은 병원 사역 이외에도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의 외과 방문 교수로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합동 교수로도 역임했다.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환자가 수용된 대구 소재 한국 육군 병원 외과 고문이자 한국 일반외과에 수술 고문으로도 사역했다.
1966년 의료 선교를 마친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가 쓴 보고서에 “나는 부자가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나의 주머니를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나의 가슴에 담은 수많은 은혜를 가득 채워 귀국한다. 나는 부자다”라고 하였다.
도슨은 2007년 2월 7일 백혈병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6명의 자녀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은혜정원에 유해를 이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그의 묘비에는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3)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치된 존 도슨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