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동산의료선교복지회


선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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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라라 헤드버그 브루언(Clara Hedberg Bruen)

  • 한국이름 : 하복음(河福音)
  • 생몰연도 : 1899. 5. 16∼1988. 9. 15.
  • 학력 : 영스타운 병원 부속 간호학교
  • 출신 및 소속 : 미북장로교(NP)
  • 한국선교기간 : 1923. 12. 19∼1941. 9. 21.
  • 동산병원선교기간 : 1923. 12. 19∼1941. 9. 19.
  • 가족사항 : Henry Munro Bruen(남편)
  • Henry Munro Bruen jr.(아들)
1. 동산기독병원 간호 선교사로 지원하다.

하복음이라 불렸던 클라라 헤드버그 브루언은 1899년 5월 1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로런스 카운티 내 배스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졸업 후에 미국 오하이오 주 영스타운 병원 간호학교에 입학하여 간호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고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실무 경험을 통해 간호 선교사로서의 준비와 경험을 쌓았다.

1923년 9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첫 사역지인 필리핀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미북장로교 선교본부에서 발간한 소식지에 동산기독병원에서 간호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여 12월 19일에 헤드버그는 6번째 동산기독병원 간호사로서 대구에 오게 되었다.

1934년 9월 결혼할 때까지 11년 동안 플레처 선교사와 조화로운 팀워크를 이루어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모범적인 병원으로 만들어갔다. 그녀는 병원 전반에 걸친 간호 실무 및 간호 행정관리를 담당하였고, 당시 발생률이 높은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나병 등 전염병 환자들을 직접 돌보았다.

2. 간호부 양성소를 개설하다.

날이 갈수록 환자는 불어나고 병원 내에 간호 인력의 수요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했고 25세의 헤드버그는 틈틈이 한국어를 배우고 간호부서장으로서 기본 업무를 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간호부 양성소 설립에 필요한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세부 업무를 직접 도맡아 처리하였다.

1924년 5월 5일 동산기독병원 의료분과의 책임자 손인식 의사와 김덕수 서무과장의 도움으로 간호부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제1대 소장을 맡게 된 그녀는 ‘이론과 임상 지식이 풍부하면서도 기독교 신앙과 직업정신이 투철한 간호 인력의 양성’을 위하여 교육이념에 부합하는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유능한 교수진 확보 및 강의실, 실습병동 배치 등의 업무를 단계적으로 추진한 결과 1925년 10월 체계화된 조직의 기본 틀을 갖추게 되었다.

개설 당시 5명의 신입생을 받아 시작하여 매년 소수의 졸업생을 배출함은 물론 이후 많은 간호 인력을 양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5년 간호부 양성소는 간호대학으로 승격하게 된다.

간호부 양성소 앞에서 클라라 헤드버그와 간호 학생들

간호부 양성소 학생들과 클라라 헤드버그, 1933. 11. 21

3. 영유아 보건사업에 힘쓰다.

헤드버그는 1928년 간호부 양성소 제1회 졸업생인 이영순 간호사를 중심으로 1930년 2월 14일 동산기독병원에 영아보건소가 개소되면서 전담간호사로 실질적 운영을 하였고, 간호부 양성소 교수로 겸임하면서 후배들에게 영유아 보건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처음 영유아 보건사업으로는 신선한 우유를 공급하는 것에 시작했다. 이후 영유아 전염병 예방 및 관리, 위생적으로 우유 보관하기, 두유나 이유식 만들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강의와 실습을 겸했다. 특히 임산부의 질병 예방, 산전 및 산후조리 및 신생아 관리 방법까지 영아보건소는 모자보건센터의 역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1932년 제1회 졸업생이 17명이었고, 1939년까지 약 200명 이상의 아동에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이러한 그녀의 초기 노력과 대구선교기지 선교사와 동산기독병원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영아보건소로 발전했다.

영아보건소, 1930년

클라라 헤드버그와 동산기독병원 영아부 제1회 졸업생, 1932년

4. 농촌 여성선교에 참여하다.

1930년 10월 20일 당시 대구선교지부에 함께 사역하던 마르다 스콧 브루언 선교사가 유방암으로 소천한 후, 평소 선교동역자로 친구였던 헤드버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병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고, 심지어 1934년 9월 4일 마르다 스콧의 남편 브루언 선교사와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신상의 안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야말로 투철한 사명 의식으로 현장과 후학 양성을 위해 헌신했던 전천후 간호선교사였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칠곡, 선산, 성주, 김천 등 경북 서부지역을 수시로 순회하면서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농촌 여성 전도사역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1942년 9월 19일 한국을 떠났다.

5. 40 years in Korea.

1944년 헤드버그 부부는 41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였다. 1959년 남편 브루언이 세상을 먼저 떠난 후 그녀는 한국에서 선교사역 중에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40 years in Korea> 라는 초창기 장로교 선교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였다.

1899년에서 1941년까지 헨리 먼로 브루언이 행한 사역의 보고서와 대구선교지부의 선구자들인 아담스 부인, 존슨 부인, 브루언 부인 그리고 그들을 뒤따른 수많은 한국인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담은 자료이다.

그녀는 1988년 9월 15일 텍사스주 트라비스 카운티 내 오스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남편이 안장된 뉴욕주 레이에 있는 개인 소유의 존 제이 묘지에 안장되었다.

클라라 헤드버그가 편찬한 헨리 브루언의 선교자료집

헨리 브루언과 클라라 헤드버그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