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라 메크레인 스미스는 1911년 8월 남편 로이 케네스 스미스 선교사와 함께 미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내한했다. 그녀는 한국에 오기 직전인 1911년 5월 15일 캔자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놀라운 것은 그녀의 논문 제목이 “한국인 연구 A Study of Korean People”이었다. 한국의 지리, 지형, 역사, 기후, 토양, 물산, 동물, 자원, 도시들, 인구들, 인종, 언어, 사회생활, 사회계층, 여성의 지위, 가정생활, 각종 종교, 기독교 역사, 예술, 무역, 의복, 결혼제도, 장례문화, 신화와 전설, 근대 역사적 상황 등에 대하여 자세한 연구를 하였다.
그녀는 1913년 남편과 함께 세브란스병원에서 안동성소병원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재령 장로교 병원에서 의료 선교와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서 1940년까지 루라와 스미스 부부는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사역하였다.
루라 스미스의 석사 학위(M.A.) 논문
루라는 1930년대에 결핵에 대한 계몽강연회와 외래 진료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병원을 방문한 환자들에게 1시간에 평균 25권의 결핵에 관한 책을 팔았다. 1,000명씩 등록한 3개의 성경공부반을 매일 방문하여 300~400권의 책을 팔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평양연합기독병원을 찾은 전체 환자 중 폐결핵 환자가 매년 25-30%로 증가하여 1940년 전반기 전체 환자 3,805명 중 486명이 폐결핵 환자였다.
1940년 루라와 스미스 부부는 평안북도 선천 미동병원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당시 결핵을 퇴치하기 위하여 계몽 사업으로 선교사들이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크리스마스 씰 캠페인은 한국의료 선교사협의회 크리스마스 씰 위원회의 주관으로 진행되었고 전국 각 선교지부마다 자원봉사 사역자를 조직하여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결핵이라는 질병과 치료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낮은 상황에서 이러한 캠페인은 기독교 병원의 결핵 퇴치 사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
루라는 1942년 남편 로이 스미스와 함께 추방되었다가 1948년 10월 1일 남편이 대구 동산기독병원의 6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내한한다. 이미 앞서 한국에서의 많은 의료 선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편을 도와 동산기독병원에서 헌신과 봉사를 하였다. 1950년 남편과 함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녀는 1979년 9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루라 매크레인 스미스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