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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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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이 케네스 스미스(Roy Kenneth Smith)

  • 한국이름 : 심의도(沈宜道)
  • 생몰연도 : 1885. 4. 28.∼1957. 7. 31.
  • 학력 : 엠포리아 대학, 캔자스 대학교
  • 출신 및 소속 : 미북장로교(NP)
  • 한국선교기간 : 1911. 8∼1942, 1945∼1950.
  • 동산병원선교기간 : 1920∼1922, 1948∼1949.
  • 가족사항 : Laura McLane Smith(아내)
  • Albert M. Smith(자녀)
  • Kenneth M. Smith(자녀)
  • Robert B. Smith(자녀)
  • Rodger B. Smith(자녀)
1. 첫 사역지로 안동성소병원에 부임하다.

심의도라 불렸던 로이 케네스 스미스는 1885년 4월 28일 미국 중부 캔자스주의 링컨에서 태어났다. 1905년 엠포리아 대학을 졸업하고 캔자스 대학교에서 진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또한 링컨제일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이후 솔로몬 노회를 통해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때문에 그는 목사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의료 선교사였다.

1911년 8월 스미스는 간호사인 루라 매크레인과 결혼하여 둘은 함께 내한하였다. 스미스는 세브란스병원에서 1년간 인턴과정의 수련을 거쳐 경상북도 안동 성소병원의 제2대 원장으로 부임을 했다. 먼저 그는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며 의료사역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동성소병원의 전신인 코넬리우스 베이커 기념병원, 1939년

2. 동산기독병원에서 간호사로 사역하다.

1917년 8월 스미스는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서 1922년까지 대구에서 사역하게 된다. 1922년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동산기독병원은 역사상 가장 번창한 한 해였다. 올해 17,364명의 환자가 병원을 다녀갔고, 548명의 환자가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수입금은 21,000엔이 넘었다. 178명의 한센병 환자도 나환자 선교회의 도움으로 애락원에서 진료를 받았다”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대구에서 사역하는 동안 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건강 효율성 Health Efficiency”이란 논문에서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건강 효율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3. 다른 지역 여러 병원에서 사역하다.

스미스는 1922년 황해도 재령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이로 인해 재령 병원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목사 선교사인 그는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개종자 숫자가 2,906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전도 활동과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폐결핵 전문의이지만 가는 곳마다 주 관심사인 병원 건축과 경영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1931년 사무실, X-레이 작업실, 환자용 개인 방들이 들어설 건물을 약 7,500달러로 건축했다.

그는 1934에 평양으로 와서 1940년까지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폐결핵 예방을 위한 치료와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을 세웠다.

그리고 1940년 선천 미동병원으로 사역지를 옮겨 결핵 전문 의사로써 결핵치료 활동과 사업이 확장해 갔다. 이로 인해 전국 22개의 기독교 병원이 결핵환자 진료사업을 시작하였다.

평양연합기독병원

4. 동산기독병원 6대 병원장으로 부임하다.

일제에 의한 추방으로 1942년 한국을 떠났다가 1948년 10월 1일 동산기독병원 제6대 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병원으로 재부임한 그는 먼저 병원 소유권을 일본으로부터 되찾아 왔다. 그리고 대구선교지부와 경북노회에서 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관을 만들어 임시이사회도 운영하였다.

당시 병원의 수입은 336억여원이었고, 지출은 331억여원으로 부채가 있었지만, 3개월 만에 다 청산하였다. 모든 병원 직원들은 매일 아침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심지어는 예배실이 작아 다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1948년에서 1949년간의 병원 보고서에는 외래진료소와 함께 내과, 외과, 소아과, 부인과, 안이비인후과, 치과, 방사선 검사실 등 7개 과가 있었고 68개의 병상은 만원이며, 이 기간 1,246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고, 외래환자는 18,153명, 61,979회의 치료를 받았다.

한국에서 33년간 사역을 감당한 그는 1949년 귀국하였다. 그리고 1957년 7월 31일 72세의 일기로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첫째, 로이 스미스는 한국 선교의 기동타격대였다. 황해도에서 대구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누비며 선교 사역을 했고 둘째, 의료선교사이자 폐결핵 전문가로서 환자들의 치료에 앞장선 것과 이 분야의 큰 발전을 도모했다. 셋째, 목사 선교사로서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개종케 했다. 넷째, 그는 병원의 건축과 경영의 귀재였다라고 했다.

로이 케네스 스미스의 부고장

로이 케네스 스미스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