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포 또는 포 선생으로 불렸던 투르자 조앤 포는 1932년 9월 17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에서 아버지 레이먼드와 어머니 루이스 포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조앤 포는 어릴 적 피아노 연주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결심으로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여 음악학사 학위를 받았고 유명한 헝가리 음악가인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의 지도로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다, 플로리다에서 대학을 다니는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여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를 통하여 박수받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보다도 복음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고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도구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이라 확신하게 되어 1956년 오클라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3년간 물리치료학 공부하고 1959년 물리치료사가 되었다. 또한 오클라호마시에 있는 자애병원에 3년간 근무하면서 물리치료과를 개설하였다.
1962년 4월 한국에서 온 동산기독병원장 하워드 마펫을 만나고 마침 물리치료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는 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미국 연합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962년 9월 12일 내한한다.
조앤 포가 물리치료과를 개설한 오클라호마시에 있는 자애병원
조앤 포가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한국 전역에 전쟁 당시의 불발 포탄들이 남아 있어서 포탄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터져서 사고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하워드 마펫 원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3년 휴전 이후 전국에서 발생한 총 1,595건의 폭발 사고로 1,656명이 사망했고 2,840명이 부상당했다. 이들 사망자 중에 450명이 10세 미만이 아이들이며, 623명은 10대 청소년들이었다. 나머지는 모든 연령층에 속하는 불구자이거나 부상자들이었다” 라고 보고하므로 당시 그 어떤 필요보다 물리치료가 환자들에게 필요하였다.
조앤 포는 미국에서의 물리치료과를 개설한 경험을 살려 서울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최초로 동산기독병원에 물리치료실을 개설하였다. 병원에 쓰지 않는 작은 탁자 1개, 의자 2개, 적외선 치료용 스탠드 하나를 들여다 놓고 물리치료실을 열었다.
물리치료실을 개설한 첫날부터 250명의 달하는 환자가 왔다. 이후 물리치료실의 확장이 요구되어 병원의 우편실을 물리치료실로 이전하였다.
조앤 포는 오전에 동산기독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오후에는 애락원에 가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조앤 포는 첫 선교보고서에서 물리치료실을 개설하고 치료한 환자들이 1,5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산기독병원에서 약 755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애락원에서 거의 같은 수의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애락원에서 11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수술을 했으며, 8명의 이식한 근육을 다시 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물리치료를 통하여 환자들이 치료되어 건강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물리치료를 하는 조앤 포
조앤 포가 동산기독병원에서 어떻게 선교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토순과 구개파열이 있는 어린 소녀에게 수술을 받게 해준 사례였다.
가난한 농촌에서 외할머니에 의해 자란 외손녀는 부잣집 수양딸로 주었다. 조건은 집안 일을 돕고 아이들을 돌보며 20살이 되면 수술을 받게 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앤 포는 그 어린 소녀를 찾아 나섰고 결국 찾아내어 외할머니를 설득시켜 어린 소녀가 수술을 받도록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당시 수술비 600만원은 엄청난 비용이었지만, 그녀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몇 달에 걸쳐서 반복하여 동산기독병원의 여러 과의 의사들이 협업하여 수술한 결과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심하게 찢어졌던 부위가 거의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회복이 되었고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예수님도 잘 믿고, 예의도 바르다고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얼굴에 있는 심각한 장애 문제로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한 사람의 인생이 조앤 포를 통하여 완전히 달라져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처럼 조앤 포의 선교는 ‘토탈 케어’선교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사랑의 결정체였다. 이후 이러한 토탈 케어의 사례들이 늘어 났고, 그녀는 어느 한 방면에서만 선교지 사람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에 들어오면 영·혼·육 모든 방면에 걸쳐서 돕고 섬겼다.
심지어 그 바쁜 와중에 1970년 말부터 존 시블리 선교사가 거제도에 시작한 거제지역 사회보건 시범사업에도 동참하였다.
토탈 케어 선교를 감당한 조앤 포
조앤 포의 투철한 신앙심에 감명을 받아 환자들뿐만 아니라, 병원 직원들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녀가 복음을 전하는데 물리치료가 좋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이 물리치료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과 관심으로 마침내 병원 내에 적지 않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는데, 그중에 임만빈 교수가 있었다. 그는 조앤 포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꼭 알려주고 싶었으며,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을 미스 포가 안다면 얼마나 기뻐할까를 생각했다”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일한 이러한 업적들로 조앤 포는 한국 정부로부터 공로상과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인도장 표창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30년 동안 물리치료실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1992년 10월 건강상의 이유로 본국으로 귀국했다. 조앤 포는 동산기독병원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 사랑의 화신이었다. 2004년에 그녀의 유방암이 재발하였고 암 투병으로 날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다가 2008년 4월 16일 7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오클라호마 기념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9년 4월 17일 동산기독병원은 1962년 영남지역 최초로 물리치료실을 개설하여 92년까지 재활 환우 돕기와 의료 현대화에 앞장서 온 조앤 포의 추모 1기를 맞아 그녀의 안면상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물리치료실 앞에 부착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정철호 동산병원장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결혼도 하지 않고 한국인을 위해 일생을 바친 조앤 포 선교사의 희생과 봉사, 그리고 한국인에게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을 되새기기 위해 추모 1주기 행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앤 포 추모 1주기 안면상 제막식, 2009. 4. 17
조앤 포 선교사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