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양으로 불렸던 폴 박은 미국 교포 3세로 10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미국 국적을 가졌음에도 늘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박희양은 미국 화이트월드 대학을 졸업한 수 미국 데칸네스병원에서 병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병리학 박사를 전공하였다. 그 후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병리학교실에 근무하고, 성 프랜시스병원 병리실 주임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하워드 마펫 원장의 초청으로 동산기독병원에 검사실 부과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병리기술학교 부교장을 맡게 되었다. 박희양은 학생들에게 혈액학, 생화학, 세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9년 박희양은 제2대 병리기술학교 교장을 맡게 된다.
그는 혈액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도너 스테이션Donor’s Station을 운영하였고 1982년 헌혈제도가 생기고 나서는 폐쇄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65년 4월 최초 전국 임상병리기사 국가자격 시험에서 동산기독병원 졸업생 전원이 합격하는 쾌거를 거두었고 1973년 9월 동산기독병원 부속 병리기술학교는 ‘대구 동산기독병원 부속 병리기사 양성원’으로 개명하였다.
1958년 7월 개교한 병리기술학교는 1992년 6월 폐교하기까지 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국내 우수병원은 물론, 미국, 캐나다 등 해외로 진출해서도 탁월한 기술과 지식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박희양은 혼신의 힘과 모든 정열, 헌신을 아낌없이 바쳤다.
병리기술학교 교수진과 폴 박(2열 왼쪽 2번째)
박희양은 인생의 황혼기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명과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영어 교사와 가정상담가로서 일상적인 봉사를 하는 것과 둘째는 그의 사재를 미국의 증권회사를 통해 저축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다음과 고백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다음과 고백하였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느헤미야 2장 17-18절에 폐허가 된 도시의 비극을 말씀하였는데, 느헤미야를 통해 새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할 마음을 주셨듯이 나는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비전을 가지고 계시는가? 내가 지어야 할 성벽은 없는가?”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지을 열망을 주셔서 사람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실 것입니다.
박희양은 포항 선린병원에서 4년간 병리기사와 영어교사로 봉사하였고 경기도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97년 겨울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두 달여 고생하다가 1998년 1월에 7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