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복이라 불렸던 루이스 스카린 그럽은 1921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탁월했던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작업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녀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장래에 남편이 될 윌리엄 알버트 그럽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UCLA 동문이었고 루이스는 뉴욕 성경신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윌리엄은 프린스턴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학생들의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 첫 만남을 가진 둘은 윌리엄이 자신은 한국에 선교사로 갈 예정이라 했고 루이스에게 한국에 가면 물리치료로 한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루이스는 1953년에 내한했다.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작업치료사로 근무하면서 전쟁 중에 팔, 다리를 잃은 한국인들에게 의족과 의수를 달아주고 재활훈련을 시켰다.
그녀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도록 도전한 윌리엄은 그다음 해인 1954년 2월 8일 내한했고 둘은 1년 4개월간 교제하다가 1955년 6월 30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감부열(Archibald Campbell) 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고 이후 아이 셋도 한국에서 낳고 키웠다.
윌리엄 그럽과 루이스 스카린의 결혼 청첩장, 1955. 6. 30
루이스는 동산기독병원과 애락원에서 물리치료사이자 작업치료사로 여러모로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병원에 필요와 하워드 마펫 원장의 기대와는 다르게 루이스를 통해 물리치료실 개설은 순탄하지 못했고 1962년 6월 조앤 포 선교사에 의하여 정식으로 개설되었다.
루이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대구 애락원에서 작업치료사로서 한센병 환자의 재활을 도와주었다. 또한 그들에게 방직 기술과 미용을 가르쳐 주었다. 이를 통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독립을 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가정을 돌보는 것도 벅찬데, 그녀는 몸을 사리지 않고 동산기독병원과 애락원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므로 많은 환우와 한센병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그녀는 한국 기독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을 잊을 수 없다. 그들과 진실로 행복했다. 자신의 삶 중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은 바로 한국에 머물렀던 40년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1955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은퇴 선교사 마을 웨스트민스터 가든 입구에서 루이스 그럽
루이스와 윌리엄 그럽 부부의 사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