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동산의료선교복지회


선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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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워드 퍼거스 마펫(Howard Fergus Moffett)

  • 한국이름 : 마포화열(馬布和悅)
  • 생몰연도 : 1917. 8. 16∼2013. 6. 3.
  • 학력 : 평양외국인학교, 휘튼 대학,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
  • 출신 및 소속 : 미북장로교(NP)
  • 한국선교기간 : 1948. 12∼1993. 1. 15.
  • 동산병원선교기간 : 1948∼1993. 1. 15.
  • 가족사항 : Margaret Delle Moffett(아내)
  • Howard Mackenzie Moffett(장남)
  • Charles(Charlie) Blanchard Moffett(차남)
  • Marilyn Moffett Taylor(장녀)
  • Samuel Moffett(막내)
1. 선교사 가문에서 태어나다.

마포삼열이라 불렸던 하워드 퍼거스 마펫은 1917년 8월 16일 평양선교기지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와 루시아 피쉬 마펫 선교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서 17세까지 평양 토박이로 자랐다. 아버지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헌신과 성공적인 사역으로 당시 평양은 동아시아 지역의 선교센터로 부상했고 선교사 자녀를 위한 외국인학교까지 세워져 있었다.

마펫은 1935년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휘튼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1941년 8월 2일 의과대학 재학 중에 약혼녀 마가렛과 결혼하였다.

그는 1947년 자신의 아버지가 소속된 미북장로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마펫 부부는 곧바로 한국에 올 수 없어서 임시로 중국 남경대학병원에 근무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1948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에 대구 동산기독병원에 도착했다.

하워드 마펫의 아버지 사무엘 마펫과 어머니 루시아 마펫

2.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기초를 세우다.

마펫은 1949년 6월 제7대 동산기독병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병원에는 의사 14명, 인턴 7명, 졸업 간호원 22명, 학생 간호원 17명, 기타 고용인 72명을 해서 총 132명이 근무했다. 거의 모든 직원이 업무를 시작하기 전 아침 예배에 참석했고 병원 전체가 마치 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이제 막 병원장을 맡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부원장 황용운 박사에게 사무인계를 하고 일본으로 갔고 그곳에서 백방으로 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가운데 과거 2차 세계 대전 중 해군의무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어서 미공군부대 파견 해군 군위관으로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이 대구 가까이 접근하고 곧 함락될 위기에 처하여 마펫은 병원의 직원과 가족들, 환자들 그리고 병원 기자재를 미군 당국의 허락을 받아 4대의 기차 차량에 나눠 타고 부산으로 피신하여 임시 병원 운영을 설치하여 3개월 동안 운영했다. 미 해병대와 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북한군을 북으로 격퇴한 이후 마펫의 가족들은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대구는 함락되지 않았고 동산기독병원의 재산도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진하자 미5공군 소속 군의관으로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 1950년 10월 21일 평양에 도착했는데, 평양을 떠난 지 15년 만에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마펫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양에서 사역하는 것과 선교부 재산을 환수하는 일 등을 진행하려 하였으나, 6·25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함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51년 미공군에 군위관으로 자원입대한 그는 근무지를 미 본토로 옮겨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맥딜 공군기지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953년부터 시카고 아인스 V.A. 병원에서 3년 동안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한 그는 드디어 1956년 내한하여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1년 동안 언어를 익히면서 사역하였다. 마펫이 병원에 없는 동안 케네스 스콧 박사가 그를 대신하여 원장직을 수행하였다. 마펫은 동산기독병원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원장 대리를 세워 병원의 모든 일들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했다.

1957년 여름 마침내 마펫은 동산기독병원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병원의 중흥기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발발로 미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대구에 다시 온 하워드 마펫

동산기독병원, 1960년대

3. 아동병원 건축과 선진 의료기술 보급.

6·25전쟁으로 발생한 전쟁고아는 약 20만명이었다. 대구 시내에만 고아원 20곳, 근교에는 29곳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고아들을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구에 수많은 고아원을 세운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명회(World Vision)의 로버트 피어스 박사가 동산기독병원에 5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돈 외에 유엔한국재건단과 주한미군 대한원조처의 원조를 받아 1953년 10월 3층 건물의 60병상을 갖춘 아동병원을 준공했다. 마펫은 피어스의 헌신을 아동 병동에 상징으로 남겼는데, 선명회의 영어 명칭인 월드비전의 첫 글자 W자를 기둥으로 디자인했다.

마펫은 한국인 의료진들과 함께 일류 병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선진 의료기술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병원의 진료와 경영의 질이 한국 최고라는 인정과 명성을 얻어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1959년에 미국에서 기증받은 250KV X-선 장치(GE사, 수냉식 X-선 발생장치) 및 100KV X-선 장치(공냉식)로 표재성 암의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1964년 11월에 개설한 신경외과는 1978년 ‘자발성 척수 경막의 혈종’의 치료의 성공적인 사례를 국내 최초로 보고하였고 1980년 4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전산화 단층 촬영기(CT)를 도입하여 다양한 질환을 진료하게 되었다.

1967년 세계적인 인공신장기 권위자인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콜프 의사로부터 직접 인공신장기 한 대를 기증받아 12월 8일 급성 신부전증 환자들에게 치료한 것이 국내 혈액투석의 효시가 되었다.

1971년 10월에는 미북 장로교 선교회의 기증으로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Cobalt-60 고에너지 감마선 원격치료기(Philips)를 사용하여 방사선 치료를 하였다.

World Vision의 첫글자 W로 아동병원 건축

방사성동위원소실에서 기부자들과 하워드 마펫, 1960. 3. 30

4. 전문인 선교사 초청과 병리 기술학교 개설.

마펫은 일류 병원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선진 의료기술 보급과 함께 의사들의 의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 구성원들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선교사로 초청하여 외국에 가지 않더라도 선진 의료기술 및 기법을 전수 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현대 의학의 병리기술 분야 발전을 따라잡기 위해 1958년 동산기독병원 부속 병리 기술학교를 개설해 1992년 이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우수한 병리 기사를 많이 배출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칠곡, 선산, 성주, 김천 등 경북 서부지역을 수시로 순회하면서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농촌 여성 전도사역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1942년 9월 19일 한국을 떠났다.

다양한 전문 분야의 초청 선교사 명단

병리기술학교 제9회 졸업식에서 하워드 마펫, 1971. 1. 29

5. 한센병 환자 케어와 간호학교 건립, 경주기독병원 사역.

마펫은 고통받는 한센병 환자의 진료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49년 애락원 제5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이사장과 원장직을 번갈아 가며 37년간 한센병 환자들을 섬겼다.

1957년 달성군 구지면 수리리에 약 12에이커(52,608㎡)의 정착지를 마련하여 원내 105명의 한센병 환자를 정착시켜 자활하게 했다. 1968년 8월 16일 병원 명칭을 ‘대구애락보건병원’으로 변경했고 2004년 ‘대구애락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동산기독병원에 간호부 양성소는 1948년 1월 미군정보건부로부터 ‘동산기독병원부속 간호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아 운영되고 있었다. 마펫은 간호학교를 대학 과정으로 격상시키고자 노력한 결과, 1961년 11월에 ‘대구 동산기독병원 간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미국 시카고 제4장로교회로부터 60만 달러를 기부받아 간호대학 7층 건물(5,363.81㎡)을 1967년에 완공했다.

마펫은 주기적으로 경주를 방문하여 의료 진료를 했다. 그러던 중 레이먼드 프로보스트 선교사를 알게 되고 이를 통해 미국 컴버랜드 제일장로교회의 후원을 받아 1962년 10월 10일 지하 1층, 지상 2층의 경주기독병원을 설립하였다. 1989년 11월 30일에 학교법인 계명대학이 인수하여 1991년 3월 15일 ‘경주동산병원’으로 개원하였다.

건축 중인 애락보건병원에서 하워드 마펫

경주동산병원, 1962년

6. 병원 발전 5개년 계획과 신개발 계획.

마펫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병원 발전 5개년 계획’의 완성과 ‘신개발 계획’이었다. 이 기간을 동산기독병원 사람들은 ‘동산기독병원 중흥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아내 델 마펫과 함께 미국과 독일의 독지가와 교단 그리고 교회들에게 후원을 요청하였고 그 후원금으로 107만 달러를 들여 외래진료소를 신축하고 102만 5천 달러를 들여 본 병동과의 사이에 연결건물을 지었으며, 13만 5천 달러를 들여 분원을 확장하고 시설을 개선했다. 또한 각종 의료 장비를 구입하거나 새것으로 교체하는 데 24만 5천 달러, 직원 주택을 짓는 데 15만 달러를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입원 병동, 간호대학 건물, 외래 진료소, 신관 병동 등이 세워졌다.

또한 신개발 계획의 내용으로는 총 37만 5천 달러의 비용을 들여 응급치료센터를 증설하고 물리치료관을 신축한다. 그리고 구병동을 헐고 신맥거관을 새롭게 증설하고 의료 장비 구입에도 비용을 배정하여 지출하였다. 의료도서비 구입과 주요 의료진의 해외 연수에도 비용을 지출하고 특히 한센병 환자 치료 사업을 강화하고 주임과장의 주택을 건축하고 분원과 농촌 의료사업에서 힘썼다.

하워드 마펫의 병원 발전 개발 계획표

입원병동 건축현장을 찾은 하워드 마펫, 1967년

현대식 시설의 외래진료소 준공, 1970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간호대학 건물, 1980년

7. 전도회 사역과 의과대학 설립.

마펫은 동산기독병원에 부임하여 원장에 취임하자 제일 먼저 전도회를 재조직했다. 전도회는 1951년 4월부터 ‘출촌진료 전도대’를 조직하여 매주 토요일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1955년 1월부터는 고아원 순회 진료 전도를 시작하였다. 또한 플레처 선교사님 때처럼 교회를 개척하기보다 이미 개척된 교회들을 후원하고 자립시키는 선교 정책을 펼쳤다.

그는 특히 간호학교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다. 실제로 간호대학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마펫 원장 부부를 당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교수가 된 김영자씨가 찾아와서 자신의 간증을 하며 마펫 부부의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하였다.

마펫의 교육선교의 정점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계명대학교와 동산기독병원을 병합하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재출발하면서 의과대학을 신설하였다. 그는 의과대학 건축을 위해 1979년에 10억원을 모금하여 병원의 명칭도 ‘계명대학교 의과대학부속 동산기독병원’으로 변경했다. 계명대학교와 동산기독병원은 1980년 10월 18일 보건복지부 장관과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병합하였다.

무의촌 진료 사역 중인 하워드 마펫

개교 당시의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8.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이루다.

45년 동안 대구에서 의료 선교의 위업을 이룬 마펫과 아내 마가렛 델 마펫은 1993년 1월 15일 마펫의 어머니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카펜테리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2009년 사마르칸트 은퇴자요양병원에서 생활하다가 2013년 6월 2일 향년 9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해 안장식에서 참석한 막내아들 샘 마펫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대구는 나의 집’이라고 하셨을 만큼 떠나시는 날까지 동산의료원과 한국을 그리워하며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계명대학교와 동산의료원이 그 설립 정신인 봉사 정신과 복음 전도를 언제나 최고의 가치로 삼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여 선교사 시절에 살던 집(현재 의료선교박물관)에서 하워드 마펫, 2010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있는 마펫 부부의 묘비

시카고 휘튼대학에 있는 마펫 부부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