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동산의료선교복지회


선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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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드브리지 오드린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 한국이름 : 장인차(張仁車)
  • 생몰연도 : 1869. 6. 9 - 1951. 7. 19.
  • 학력 : 라파예트 대학, 펜실베니아 의과대학
  • 출신 및 소속 : 미북장로교(NP)
  • 한국선교기간 : 1897. 12. 25 - 1912. 11. 15.
  • 동산병원선교기간 : 1899-1912. 11. 15.
  • 가족사항 : Edith Parker Johnson(아내)
  • Mary Johnson(장녀)
  • Woodbridge Odlin Johnson. Jr(장남)
  • Ruth Foster(차녀)
  • Newton A. Johnson(차남)
1. 대구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부임하다.

존슨은 미국 일리노이주 게일스버그에서 태어났고 라피엣 대학 재학 시절에 무디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큰 감동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의사가 된 후에 해외 선교에 뜻을 같이 할 이디스 파커를 만나서 결혼하여 둘은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대구에 먼저 와 있던 아담스 선교사의 편지 내용 중에 ‘사람들이 당신이 의사인 줄 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 189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주일, 근대 의술과 병원의 불모지인 대구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듯 첫 의료 선교의 탄생을 알리는 존슨 부부가 대구에 도착하였다.

존슨의 동산기독병원의 초대병원장으로 13년간 사역하였다. 대구에 도착한 그는 먼저 2년 동안 언어 훈련에 집중했고 1899년 7월에 '미국약방'(美國藥房)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람들을 힘닿는 대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1899년 12월 당시 대구선교지부 부지 내에 옛날 머슴이 살던 집과 헛간을 개조한 임시 건물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진료소를 개설하여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다.

존슨이 시작한 미국 약방

동산기독병원의 전신 대구의 제중원

제중원을 개원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존슨은 1,756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수술도 50건이나 되었다. 이때 필라델피아 제2장로교회와 라이트가 거액을 기부하여 '라이트 기념병원'을 세웠다. 그러나, 건물이 부실하여 태풍으로 병원은 무너졌고 1906년 병원을 재건축하고 이름을 ‘메리 화이트 병원’이라고 지었다.

2. 대구 최초 제왕절개 수술과 제중원 의학교를 세우다.

1909년 당시 한국인 산모 중에는 출산 후 자궁이 탈출되거나 태아가 죽어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 존슨은 대구에서 처음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산모와 태아의 목숨을 건졌다. 이를 통해 그의 명성을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그는 1908년과 1909년 2년 동안에 7명의 젊은이를 선발하여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가르쳤다.

수술을 집도하는 존슨, 1909. 6. 27.

대구 제중원 의학교에서 존슨과 의학생들, 1908년

3. 순회전도사역과 한센병 환자 진료소를 세우다.

존슨이 1906년 12월 3일에 대구에서 기록한 보고서에는 브루언 선교사와 함께 김천과 구미지역의 여러 곳을 전도한 내용이 나와 있다. 오성이라는 지역에서 전도한 기록과 평촌 지역에서 전도 및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 몇 명은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두 명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경상도 보리 문둥이’라는 말이 있듯이 경상도 지방은 한센병 환자가 유독 많았다. 그들은 또한 매독에 감염되어 있어 저들의 매독을 치료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제중원에는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찾아왔다. 존슨은 병원 근처에 있는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10명의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하였다. 이것이 한센병 환자 진료소의 시작이다.

마부와 전도 여행 중인 존슨

4.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와 건강 악화로 귀국하다.

존슨은 미국 미주리주의 한 육묘장으로부터 직접 약 40여 그루의 각종 과일나무를 들여와서 심었다. 그중에 사과나무가 있었다.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였던 고 이상근 목사는 “대구는 사과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 사과가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 된 것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다”라고 하였다. 당시 존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단지 복음만을 전하지 않고, 선교지 사람들이 좀 더 나은 경제적인 삶을 살도록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환자치료의 과중한 업무와 병원의 모든 관리 감독 및 재정적 책임까지 이중고를 겪으며 결국 과로로 인해 1912년 11월 15일 정든 대구를 작별하고 아내 이디스 파커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7월 19일 존슨은 글렌데일 요양원에서 8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한국인에 대한 사랑과 의료선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동산의료원 역사의 장을 연 초대병원장 존슨에게 바칩니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대구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

병원 내 사택 앞에서 존슨 가족들

존슨 추모비와 묘비, 캘리포니아 주